▲ 사진 시계방향으로 김선택 연주자가 그랜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주를 마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선택 씨와 갈고리 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

뜻하지 않은 사고로 왼손을 잃었지만, 나머지 한 손으로 환상적인 피아노 선율을 들려주는 아주 특별한 예인(藝人)이 있어 화제다.
그 주인공은 부산 남구 용호동에 사는 김선택 씨.
그는 청소년 시절 폭발사고로 한 손을 잃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50년 가까이 영화음악 전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선택 씨는 “음악 아니 피아노가 나를 살렸다. 죽는 날까지 건반을 누르며 가난한 이웃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도전의식을 일깨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 날, 피아니스트 김선택 씨를 만나기 위해 서면으로 차를 몰았다.

술시가 돼서인지는 몰라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식히려는 모양이다.

부산 부산진구 서면 문화로 49-2, 3층 서면 굴다리.

내비게이션을 찍고 달려온 이곳은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부산문화·예술인 네트워크 공간이라는 간판이 인상적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좁지 않은 공간이 기타 소리로 가득하다. 기타 수업을 하는 눈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던 중 가게 한쪽에 먼저 자리를 잡은 오늘의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듬직한 체구에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인상적인 김선택 씨.

1962년 범띠생이고 충남 청양이 고향이라고 밝힌 그는 현재 자동차 전자 장치 수리와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부산과 인연에 대해 먼저 물었다. 부산은 숟가락 들고 와서 일가를 이룬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1985년 돈을 벌기 위해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고생 또 고생 끝에 1992년 열쇠 보안업을 시작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이후 2003년 경성대 앞 센추리 빌딩에 사무실을 내고 1세대 자동차 전자 기술자로 개인적인 발전을 이루고 돈도 제법 벌었습니다. 그 사이 지금 아내와 결혼해 두 딸을 얻었습니다”

분위기가 다소 가벼워졌다. 그래서 선택 씨의 또 다른 직업(?)인 피아니스트로 사는 삶을 물었다.

사실 오는 취재는 성공한 사업가 김선택이 아닌 예술인 김선택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다. 섭외 단계부터 양해를 구해서인지 인터뷰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피아니스트 김선택
청소년 시기 사고로 왼손 잃어
한 손으로 피아노 치며 불행 극복

영화음악 전문 연주자로 ‘명성’
청소년 대상 강연도 희망 메시지

사업가 김선택보다 더 자연스럽고 어울리는 호칭이 아닐까. 그것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는 현란한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충만한 감성 소울 피아니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한 손으로 연주하는 장애인 피아니스트라는 것이다. 사고로 왼쪽 손을 잃은 그의 연주 실력은 가히 수준급이다.

조심스럽게 장애를 입게 된 사고 얘기를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18살 되던 해였습니다. 고향 냇가에서 친구들과 폭약으로 고기를 잡다가 도화선이 없어 안심했던 TNT에 불꽃이 옮겨붙어 터지면서 왼손을 잃게 됐습니다. 사고로 오른손 신경도 절단되고 얼굴에도 상처를 입어 고생 많이 했습니다.”

김선택이 피아노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동네 작은 교회에서였다. 풍금을 독학으로 배우다시피 하며 음감을 익혔다. 타고난 재주인지는 몰라도 웬만한 찬송가는 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불의의 사고로 한쪽 손을 잃은 청년 김선택은 장애인 시설에 입소해 생활을 시작한다.

그렇게 좋아했던 피아노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기타를 치며 아픔의 긴 터널을 넘었다.

상처가 아물면서 그는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그것은 사명과도 같았다.

아픈 손을 부여잡고 개척교회에서 찬송가를 반주하기 시작했다. 오른손 다섯 손가락과 사고로 잃은 왼손 갈고리 끝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건반을 눌렀다.

모두 여섯 손가락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음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일반인 보다 두 배의 속도를 내야 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고생도 많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됐다.

전국을 돌며 부흥회라는 부흥회는 다 쫓아다니며 반주를 도맡았다. 산상 부흥회 자리에서는 오르간도 연주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살보다 더 빠른 세월이었다.

김선택은 피아노에 아니 신앙에 기대어 장애의 아픔을 이겨냈던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보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싶어 원망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와 피아노가 있어 절망의 순간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기적과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불러주는 이들이 생겨났다.

김선택은 20명이 모이는 공연에도 참석하고 때로는 1000명이 넘는 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상 강연도 다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장애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체험담을 들려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선택 씨의 연주를 듣고 감동한 아이들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가 하면 생을 포기하려던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다시 찾았다고 알려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반응에 그는 쑥스럽다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는다.
“제 음악을 듣고 죽으려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감사하죠. 한편으로는 쑥스럽기도 하고요. 〈웃음〉 무엇보다 제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아이 중에 실제로 그 꿈을 이룬 친구들도 있어 뿌듯하답니다.”

교회 반주를 잠시 쉬던 시절, 선택 씨에게 또 다른 음악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지인들과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해운대와 중앙동 등 부산 곳곳의 음악 카페에 고가의 디지털 피아노를 사다 놓고 틈나는 대로 건반을 두드렸다. 그중에서 최애 공간은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서면 굴다리다. 여기서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왕성한 사회활동을 보였다. 그즈음 수필로 문단에 등단하기도 했다.

사무실에도 피아노가 있다는 선택 씨는 자신을 영화음악 전문 피아니스트라고 얘기한다.
“저는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면 한 편의 영화 주인공이 된듯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여기에 호응해 주시는 관객들이 있으니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저의 것이 되는 것이죠”

지인들도 그의 피아노는 영화음악을 연주할 때 더욱 빛이 난다고 입을 모은다.

그가 주로 연주하는 곡은 영화음악으로 알랭 드롱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1960)’ 주제곡이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프랑스 출신의 리처드 클레이더만이다.

갑자기 그의 연주가 듣고 싶어졌다.
한 곡을 부탁하자 못 이기는 척 피아노로 향하는가 싶더니 주방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여주인에게 청테이프를 요구한다.

익숙하다는 듯 청테이프를 건넸고 선택 씨는 왼손에 끼워진 갈고리 끝마디에 청테이프를 감았다. 피아노 건반을 보호하고 고운 소리를 내기 위한 그만의 비법이란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영화음악 ‘태양은 가득히’ 주제곡이 그랜드 피아노에서 춤을 춘다.

눈을 가만히 감아본다.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신분 상승 욕구에 사로잡힌 청년 알랭 들롱의 태양보다 강인한 눈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글픔과 공허함이….

도저히 한 손으로 연주한다고 느낄 수 없다. 어느 유명 피아니스트라고 이보다 잘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절로 손뼉이 쳐진다.

●봉사왕 김선택
전자 장치 프로그래머로 사업 성공
필리핀 코피노 끼니 걱정 해결 ‘보람’

현지인들, 피터 팬 후크 애칭 선물
20여 년 세월 “뒤돌아보니 행복”

다시 돌아와 앉은 자리.

연주의 흥이 채 식기도 전에 이번에는 봉사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선택 씨는 사고를 당한 후 삼성전자 계열사에 입사하면서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5년간 납땜 냄새를 맡다 보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뒤도 안 보고 부산행을 결심했다. 1985년 부산에 내려온 그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1992년 열쇠 보안업에 뛰어들었다. 몇 해 지나 차량에 도난방지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그의 사업은 불처럼 일어났다.

때를 같이해 평소 생각해 왔던 봉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용호동 모 교회 장로로 피택을 받고 선교사로도 활동하며 그의 봉사활동은 더욱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20여 년 전 선교를 위해 찾은 필리핀 루손섬. 가난하고 힘든 현지인들을 바라보면서 종교보다도 먹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특히 한국인 남자와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코피노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 주력했다.

10년 전부터는 필리핀 워킹 스트리트 등에서 봉사를 이어갔다. 한 달에 일주일은 어김없이 필리핀을 찾았다. 3주간 열심히 번 돈을 필리핀의 낮은 자들을 위해 썼다.

필리핀 이야기가 나오면서 선택 씨의 눈은 더욱 반짝거린다.
“필리핀 유학생 중에는 필리핀 현지 여성들과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다가 아이를 갖게 되면 호주나 뉴질랜드 등으로 도망가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일명 코피노라 불리는 아이들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었습니다. 선교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끼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제힘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한 달에 3주는 국내에 머물며 열심히 일했고 나머지 한 주는 필리핀에서 아이들과 지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한 필리핀 현지인들은 그에게 ‘피터’ 또는 ‘후크선장’이라는 애칭을 선물했다.

그가 필리핀을 찾는 날이면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 “Hello Hook”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고 반겼다. 적어도 이곳에서 선택 씨는 영원한 소년 같은 어른 피터 팬이다.

후크라는 별명은 갈고리 팔을 한 선택 씨를 정겹게 부르는 말이리라.

필리핀에서 가장 기억나는 때를 물었다. 선택 씨는 순간 쌍둥이를 임신한 어린 소녀가 떠오른다고 얘기한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필리핀 현지에서 쌍둥이를 임신한 10대 임산부가 수술비가 없어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필리핀을 달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모릅니다”

●김선택 씨의 비전
코로나 펜데믹 고통의 시간
음악으로 심신 달래며 재충전

자선공연 부활로 새로운 도전
독주회 통해 희망 메시지 전달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커지면서 선택 씨는 더 큰 봉사를 위해 자선공연을 계획하고 실제로 무대를 꾸몄다.

공연이 탄력을 받을 즈음 코로나 19라는 장애물이 닥쳤고 필리핀과 잠시 이별을 해야 했다.

코로나는 잔인했다.
그렇게 보고 싶은 필리핀 아이들과 이웃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은 선택 씨에게는 어떠한 고문보다 고통스러웠다.

선택 씨는 약간의 술로 자신을 달래도 봤지만, 그의 마음에 평안을 준 것은 역시나 음악이었다. 뜻 맞는 지인들과 자신의 아지트에서 연주하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코로나 19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면서 선택 씨는 희망과 도전이라는 단어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먼저 자선공연을 다시 기획해 필리핀 아이들은 물론 국내 어려운 이웃에게 힘을 보탤 요량이다. 국내 유명 마술사와 기획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가을께쯤 이름이 잘 알려진 마술사와 자선공연을 하기로 하고 현재 조율 중입니다. 마술과 음악의 콜라보를 통해 코로나와 경제난으로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젊은이들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한다는 것이 자선공연의 목표입니다.”

선택 씨는 또 자선공연과 함께 독주회도 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얘기한다.
“부족한 저의 피아노 선율을 통해 삶의 희망을 깨닫게 됐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뭔가 모르는 사명감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생을 마감하려는 절망적인 순간에 저의 음악을 듣고 다시 용기를 얻어 살아났다는 연락을 받을 때면 그분보다 저가 더 힘을 얻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찌 됐든 공연을 통해 많은 사람의 마음이 따뜻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문화공간 굴다리 안은 손님들로 가득하다. 색소폰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 등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눈인사를 한다.

인터뷰를 갈무리하며 그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특유의 여유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들 행복하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짧은 대답을 한다.
“바라는 게 뭐 있겠어요. 저도 그렇고 아는 지인분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음악 등으로 위로를 받기를 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다시 나선 서면 거리에는 더욱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불의의 사고로 한 손을 잃고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 피아니스트 김선택.

그가 건너온 고통의 세월만큼 그는 단단해 보였다.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가난하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과 도전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그의 계획과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