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물안개가 산을 안고 낮게 흐른다. 숲길이 축축하다.

쪼옥- 쪼옥- 굴뚝새 한 마리가 산을 깨우자, 눈을 뜬 나무들이 기지개를 켠다. 물기를 머금은 붉나무의 잎이 더 짙어졌다. 늦가을인 이즈음 장자산 숲은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섬쥐똥나무 껍질은 단단해졌고, 자귀나무잎도 갈색 물을 머금었다.

이곳저곳 눈길을 주며 느릿하게 걷는 지금. 하루 중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다. 무언가 짓누르는 듯 가슴이 답답하거나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 혹은 마음이 신산할 때면 곧잘 장자산을 오른다.

집과 가까운 곳에 이처럼 고운 산이 있다는 것이 내게 큰 행운이라고 감사해하며 걷는다.

산 들머리에서 약간 가파른 봄보리수나무 군락의 좁은 길을 따라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저만치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바람결을 따라 흐르는 안개 사이로 노란 감국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자잘한 꽃들이 세수를 한 듯 젖어 있다. 얼마 전 까지 무덤이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장을 하였는지 봉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산을 오를 때마다 그 봉분을 보면 늘 외로운 섬을 느꼈었다. 손 때 묻은 추억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하고 망망대해에 서 있는 섬처럼 혼자 누워있던 봉분. 그 섬을 보며 결국 삶은 저렇게 혼자가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지곤 했었다. 그리고 나를 짓누르는 고단한 삶이 그저 별 것 아니라며 위로를 받곤 했었다.

“벌써 낙엽이 많이 졌네. 아까운 것. 우리 부지런히 날마다 옵시다. 단풍 다 지기 전에...” 몇 걸음 앞에서 노부부가 앞 서거니 뒷 서거니 느릿하게 걷고 있다. 문득, 단풍이 다 지기 전에 라는 말이 머리를 울린다. 조금 전 봉분을 생각했던 탓인지 낙엽 진 길을 걷는 노부부에게서 삶의 종착역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착역을 향하는 부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있다. 서둘지 않는 걸음과 옷깃을 여며주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작은 모습 하나하나가 안개에 휩쌓인 산처럼 편안해 보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떨어진 낙엽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아는 척을 한다. 특히 오래 전에 떨어진 낙엽은 밟히고 밟힌 탓에 잘게 부서져 부드러운 융단 위를 걷는 느낌이다. 나뭇잎의 상처가, 그 상처를 딛는 우리에겐 따뜻함과 푸근함으로 안겨온다.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또 욕심도 훌훌 털어버리라는 일깨움인 듯하다.

아마도 세월이 지나면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지혜가 되는가보다. 나만을 고집하던 이기심에서 벗어나 밟히는 낙엽처럼 모두와 공유하는 마음이 생기니 말이다.

한 해를 보낼 채비를 해야 하는 11월도 다 지나는데, 빈손이라는 아쉬움으로 가슴이 시렸던 요즘이다. 그런데 역시 산에 오길 잘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나무에게서 비우는 것을 배우고 들꽃에게서 무심을 알아챘으니 말이다.

여명이 걷힌 수평선 위로 찬란한 빛을 뽐내며 해가 솟아오른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고 한다.

눈앞에선 보이지 않지만 땅 속에 또 마음속에 갈무리하며 훗날을 기약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제가 가고 오늘이 왔듯이 내일 또한 변함없이 다가온다. 그러면 지칠 줄 모르는 태양처럼 우리의 삶도 이어지겠지. 비우고 채우는 연습을 반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