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길산

우리 속담에 ‘입춘 거꾸로 붙였나’ 하는 게 있다. 입춘이 지난 뒤 날씨가 다시 추워졌을 때 하는 말이다. 올해 입춘은 2월 4일. 설 연휴 다다음날이었다. 연휴 며칠을 포근하게 지낸 다음날부터 갑작스런 한파가 몰아쳐 한겨울로 돌아간 듯했다. 강원도에는 연일 대설경보가 내렸고 부산은 때 아닌 추위로 독감에 걸린 사람이 속출했다. 속담 그대로 입춘을 거꾸로 붙였다.

그렇긴 해도 입춘은 봄의 상징이고 시작의 상징이다. 입춘은 24절기의 첫 번째.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절기는 1년을 보름 간격으로 24등분해서 계절을 구분한 것이다. 입춘에서 시작해 대한에서 끝난다. 소한 대한 모진 추위 모두 견뎌 내고 봄을 맞는 마음은 옛날에도 각별했던지 입춘첩을 써 붙인다거나 입춘 음식을 나눠 먹는다거나 하는 각종 풍속이 전해진다.

입춘음식 햇나물

입춘 음식은 다양했다. 요즘은 음식이 일반화돼 있지만 지역마다 계층마다 먹는 음식이 달랐던 옛날엔 음식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겨울 명태가 특산이었던 함경도에선 입춘 음식으로 명태 순대를 만들어 먹었고 궁중에선 오신채(五辛菜) 또는 오신반(五辛槃)이라고 해서 다섯 가지 톡 쏘는 맛의 모둠 나물을 즐겼다. 오신반은 겨자와 함께 무쳐서 먹는 생채 요리. 엄동을 지내며 부족했던 영양분을 햇나물 요리에서 보충했다.

예나 지금이나 입맛은 엇비슷할 터. 궁중 바깥 민가에 사는 사람은 들판에서 햇나물을 뜯어 먹었다. 그것을 세생채(細生菜)라 했다. 파와 당귀, 겨자 등의 어린 싹으로 입춘채를 해 먹었다. 물론 세생채, 입춘채 재료는 지역마다 달랐다. 따뜻한 지역과 추운 지역 나물이 같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신반이든 세생채든 공통점은 있었다. 햇나물을 썼다.

입춘 무렵 시골에 가 있었다. 경남 고성 산골이었다. 거기서 세생채를 맛볼 수 있었다. 옆 마을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햇쑥으로 끓인 국을 대접받은 것이다. 햇볕 잘 드는 후배 집 주위 싹을 내밀기 시작한 쑥으로 국을 내 온 것이다. 자잘한 햇쑥 향긋한 향과 진한 맛은 곧 봄의 향과 맛이었고 입춘의 향과 맛이었다. 연일 대설경보가 내리고 독감 환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었다.

봄이 온다는 믿음

봄은 어김없이 온다.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린 나무는 무슨 힘으로 엄동을 견디는가. 봄이 온다는 믿음이 엄동을 견디게 한다. 사람도 견디기 힘든 엄동을 쑥 뿌리는 무슨 힘으로 견디는가. 봄이 온다는 믿음이 엄동을 견디게 한다. 봄이 온다는 믿음. 그것이 언 땅을 녹이고 싹을 틔운다. 우리 사람살이도 마찬가지다. 24절기 맨 처음에 입춘을 둔 건 봄은 어김없이 온다는 믿음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살이를 괴롭히는 그 어떤 것도 때가 되면 물러난다는 꿋꿋한 믿음과 희망이 입춘 두 글자에 녹아 있다.

눈이 봄비로 바뀌다

입춘 다음은 우수(雨水)다. 둘 다 2월 절기다. 1년 24절기이므로 매달 두 절기가 있다. 우수는 말 그대로 빗물. 눈이 봄비로 바뀌면서 언 땅이 녹는다는 절기다. 이 날 내리는 비를 우숫물이라고 한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속담은 아무리 막 돼 먹은 날씨라도 이 날이 되면 누그러진다는 뜻. 우수는 왜 있을까. 입춘 추위에 놀란 마음을 달래려고 있고 봄은 어김없이 온다는 믿음이 입춘 추위로 흔들릴까 봐 있다. 봄이 온다는 믿음을 뜨겁게 달구려고 우수가 되면 논두렁 밭두렁을 태운다.

입춘과 우수가 든 2월은 절기상 한 해가 시작되는 지점. 시작 지점은 시간일 수도 있겠고 공간일 수도 있겠고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 지점이 어디든 시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소치 동계올림픽 중계방송에서 매일매일 듣던 ‘레디(READY)!’가 그 공평을 증명하고 이어서 터지던 ‘탕’ 총소리가 그 공평을 또 증명한다. 누구라도 한 발 먼저 나가면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끝은 다 달랐어도 어쨌든 시작은 다 같은 출발선상. 그 선상에 지금 우리는 서 있다. ‘레디’ 같은 입춘은 막 지났고 이제 곧 ‘탕’ 총소리 들릴 것 같은 우수다.
시인 / dgs1116@hanmail.net